석유보다 값진 데이터 시대에 한국의 역할
- Charles K

- 2025년 12월 19일
- 3분 분량
최종 수정일: 2025년 12월 19일
한 시대의 패권은 언제나 핵심 자원을 누가 통제하느냐에 의해 결정됐다. 산업화 시대의 핵심 자원은 석유였다. 석유가 있어야 공장을 돌릴 수 있었고, 공장이 있어야 상품을 생산할 수 있었다. 국가는 석유를 확보하기 위해 전쟁도 불사했고, 글로벌 질서는 에너지 흐름을 중심으로 재편됐다. 그러나 지금 이 질서는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바뀌고 있다. 석유보다 중요한 자원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바로 데이터다.
데이터는 단순한 정보의 집합이 아니다. 그것은 미래 수요를 예측하고, 행동을 미리 계산하며, 의사결정을 자동화하는 능력의 원천이다. 과거에는 석유를 태워 물리적 생산을 했다면, 이제는 데이터를 학습시켜 새로운 상품과 서비스를 만들어낸다. 이때 중요한 것은 데이터의 양이 아니라 성격이다. 얼마나 현실에 가까운 데이터인가, 얼마나 반복 가능하고 누적 가능한가, 그리고 그것이 실제 산업과 연결돼 있는가가 관건이 된다. 이 지점에서 데이터는 민간 자산을 넘어 국가 전략 자산으로 성격이 바뀐다.
그래서 지금 국가는 데이터를 모으는 데 사활을 걸고 있다. 이는 단순한 디지털 행정이나 플랫폼 육성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AI 시대에 국가는 더 이상 법과 제도만으로 경쟁력을 유지할 수 없다. 어떤 데이터를 확보하고, 어떤 연산 능력 위에서 그것을 학습시키느냐가 국가의 산업 경쟁력과 안보를 동시에 결정한다. 이 흐름을 가장 노골적으로 실행하는 나라가 중국이다.
중국은 데이터를 기본적으로 국가 소유로 본다. 행정, 소비, 이동, 생산, 감시 데이터까지 방대한 데이터를 정부가 먼저 수집하고, 이를 민간 기업에 선택적으로 개방한다. 자유 시장의 관점에서 보면 비효율처럼 보일 수 있지만, 대규모 학습과 실험이 필요한 AI 영역에서는 오히려 강력한 구조다. 중국의 자율주행, 스마트시티, 산업 자동화가 빠르게 전개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데이터는 이미 충분히 갖춰져 있다.
반면 미국은 전혀 다른 위치에 있다. 알고리즘, 자본, 플랫폼, 인재까지 모두 갖고 있지만 결정적인 것이 하나 부족하다. 바로 현실 세계의 데이터다. 특히 제조 현장, 공정, 불량, 미세 오차, 숙련 노동의 암묵지 같은 데이터는 미국 내부에 거의 없다. 디지털 세계의 데이터는 넘치지만, 물리적 세계를 이해시키는 데이터는 부족하다. AI를 한 단계 더 진화시키기 위해 필요한 데이터가 미국 밖에 있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미국의 전략이 드러난다. 미국은 중국과의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중국을 고립시키는 동시에, 동맹국의 산업 레벨을 끌어올리는 방식을 택했다. 그 중심에 한국이 있다. 한국은 중국처럼 현실 제조 데이터를 갖고 있으면서도, 미국 중심의 기술·안보 동맹에 편입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나라다. 즉, 미국 입장에서 한국은 중국을 대체할 수 있는 ‘현실 데이터의 공급원’이 된다.
최근 엔비디아 CEO 젠슨 황이 한국을 방문해 언급한 26만 장 수준의 AI 반도체 제공 발언은 이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이것은 외교적 수사나 호의의 표현이 아니다. 연산 능력, 즉 컴퓨트는 AI 시대의 새로운 에너지다. 이 정도 규모의 GPU는 국가 단위 데이터센터 역량을 구축할 수 있는 수준이며, 전 산업을 AI 학습 대상으로 전환할 수 있는 임계치다.
이 발언의 의미는 명확하다. 데이터가 있는 한국이 그 데이터를 단순히 제공하는 데 그치지 않고, 직접 학습하고 가공하며 진화시킬 수 있는 하드웨어를 갖추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미국 빅테크는 한국에서 현실 데이터를 얻고, 한국은 그 데이터를 산업 경쟁력으로 전환할 연산 인프라를 확보한다. 이는 종속 구조가 아니라, 이해관계가 명확히 맞물린 윈윈 구조다.
중요한 점은 미국이 데이터를 반드시 소유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접근만 가능하면 된다. 모델과 플랫폼은 미국에 있고, 글로벌 가치 포획은 여전히 미국 기업이 담당한다. 반면 한국은 데이터를 외부로 빼앗기면 끝이지만, 국내에서 학습하고 축적하면 산업의 질이 달라진다. 그래서 GPU를 ‘주는’ 것이다. 한국이 자국 내에서 연산하도록 만드는 것이 미국에도 유리하기 때문이다.
중국은 이 구조에서 또 다른 숙제를 안고 있다. 데이터는 이미 충분하지만, 하드웨어가 부족하다. 최첨단 GPU와 선단 공정은 강력한 수출 규제에 막혀 있다. 그래서 중국은 내제화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 문제는 AI 경쟁에서 시간은 가장 치명적인 변수라는 점이다. 연산 제약은 학습 속도의 제약으로 이어지고, 이는 곧 경쟁력 격차로 연결된다. 중국은 하드웨어 문제를 극복해야만 다음 단계로 갈 수 있다.

한국의 과제는 다르다. 한국은 제조 데이터에서는 이미 세계 최고 수준이지만, 제조업 외 산업의 데이터는 상대적으로 부족하다. 헬스케어, 바이오, 금융, 소비, 도시, 공공 데이터의 통합과 활용은 아직 초기 단계다. 그러나 고령화, 노동력 감소, 글로벌 경쟁 심화라는 구조적 제약 속에서 한국이 선택할 수 있는 성장 경로는 명확하다. 전 산업을 데이터화하고, 이를 AI 학습 대상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이 모든 흐름은 결국 하나의 결론으로 수렴한다. 지금의 미·중 경쟁은 관세나 무역, 환율의 문제가 아니다. AI 역량의 경쟁이다. 중국은 하드웨어를 극복해야 하고, 미국은 현실 데이터를 확보해야 하며, 한국은 데이터의 범위를 전 산업으로 확장해야 한다. 각자의 과제는 다르지만, 싸움의 본질은 같다.
석유의 시대에는 유전이 패권을 결정했다. 데이터의 시대에는 누가 데이터를 학습시키고, 누가 그 위에 산업을 재구성하느냐가 패권을 결정한다. 그리고 지금 이 싸움의 한가운데에 한국이 있다. 이것은 기회이자 시험이다. 이 연산 인프라를 전략 자산으로 인식하고 관리할 수 있다면, 한국은 단순한 제조 강국을 넘어 AI 산업 국가로 도약할 수 있다. 반대로 그렇지 못하다면, 또 한 번 중요한 변곡점을 흘려보내게 될 것이다.
지금 벌어지는 모든 움직임은 우연이 아니다. 모든 길은 AI로 이어지고 있다.




댓글